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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네가 저지른 악마의 편집으로 재조립되면서 엉망진창 망가진 내 인생

by 뮤떤여자 2024. 11. 25.

2024.05.18. 컬렉티드 스토리즈 2회차 관람 총평
(첫 관람은 2024.05.09.)

각자 선택한 삶에서 쌓아 올린 금자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그마저도 Collected Stories.

 

 

빈 무대를 촬영할 수 있어서 티켓과 함께 촬영했던 사진이 있었는데 깜박 잃고 말았다... 어쨌든 정말 봤다는 인증을 이렇게라도...^_T



1. Collected Stories.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본 부분은 바로 제목, 그중에도 (편의상, 영어를 계속 한글로 기재하겠다.) ‘컬렉티드’라는 부분이었다. 극을 소개하는 페이지에는 ‘컬렉티드 스토리즈’라는 단어를 단편소설집이라고 정의하는 듯싶다. 하지만 엄밀히 영어로 이 두 단어를 본다면, ‘주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은’ 이야기를 뜻한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 보니, 극의 시놉시스는 하나의 이야기 흐름인데,
어떻게 단편소설집이라는 제목으로 극이 정의될 수 있을까, 굉장히 궁금했다.
첫 관극을 마치고, 극을 본 파트너와 팀 루스, 팀 리사로 나뉘면서 의견이 분분할 정도였다. 같은 극을 보고, 이렇게까지 의견이 갈린 적은 처음이었다.
이번 관람을 마친 후, 나는 완전히 팀 루스가 되었으나,
그와 별개로 총평과 같이 결국에는 ‘각자 선택한 삶에서, 자기 손으로 쌓아 올린 금자탑 (루스는 가장 사랑하며 저를 쏟아부은 제자 리사, 리사는 남의 삶을 훔쳐서 만든 첫 장편소설) 을 자신이 무너뜨리는, 즉 스스로 모은 이야기로 인생이 박살 나는 인물을 그린 극’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후기를 며칠에 거쳐서 쓰는데, 단편소설집이라는 정의조차도 맞겠다는 생각이다. 단편소설이라는 정의조차도 결국에는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데 엮어서 낸, 한 권의 책이고 그 속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팀 루스인 만큼, 리사의 모순부터 꼬집자면.

2. 끊임없는 취사 선택
리사는 루스에게 영적 체험을 하는 것 같다면서 스승이자 멘토로 루스를 추앙하며 옆에서 모든 것을 보고 배우다 못해서, 그대로 복사라도 할 것처럼 스승에게 달라붙는다. 하지만 그때 리사는 루스의 말을 자신의 편의에 맞춰 (5막에서 밝혀진다.) 취사 선택한다.
이런 태도는 이어져서 평론에서도 취사 선택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이후로도 이어져서 평론에서도, 루스가 자신에게 준 단편에서도 동료 작가로서 조금 더 포괄적인 부분을 보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파편적으로 보고 확대하여 해석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 자신의 신작 발표회에 스승이자 멘토 그리고 이 신작의 주인공 루스가 오지 않음을 원망하며 극한의 갈등으로 치닫는 때도 마찬가지의 행태를 보인다.
리사는 계속 모른다, 죄송하다고 말한다. 사람이 죄송한 걸 알면 하지 말아야지. 아니면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지. 결론은 아니라는 뜻이지!
리사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의 발전만을 추구하며 (그마저도 사실 누구 하나 청한 적 없는, 말 그대로 자신이 선택한, 남의 삶을 훔친 장편소설을 쓴다는 방식으로 발전을 추구한다.) 자신만의 이기적인 답이 있는 취사 선택을, 정말 자기 멋대로 하며 인생 말년에 다다른 멘토이자 자기 스승의 인생을 완전히 망치고, 그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까지 망친다.


3. 사과하지 않는 회피.
앞서, 리사가 계속 죄송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실상, 그저 입버릇처럼 나오는 반사적인 말이고, 그리하여 빈껍데기일 뿐이다.
리사는 실제로 루스가 정말 화가 난 자신의 행동들은 사과하지 않는다.
첫 번째. 2막에서 리사가 루스의 공간을 함부로 정리한다.
루스가 혼자 사는 중년, 즉 자기만의 삶에서 이미 충분히 쌓아 올린 방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진짜 너무 화가 날 만한 이 상황에서. 리사는 끊임없이 루스에게 변명한다.
루스는 이유를 묻고, 황당해하고, 당연히 화를 낸다. 여기에 대고, 리사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한다.
그동안 너의 까탈스러움에 내가 너무 힘들었고, 너의 우월함에 나의 원고나 의견을 말하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혼자 분통을 터뜨리며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다고, 다 됐으니 난 더는 조교 못하겠다고 자리를 박찬다.
스승인 루스가 시키지 않은 짓을 자기가 마음대로 저지르고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그냥 도망친다.
이때 루스가 리사를 붙잡고, 리사는 그 용서에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뉘우치지 않은 채로 그저 스스로 내팽개친 스승의 집 열쇠만 냉큼 도로 챙긴다.
두 번째. 루스와 리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서 리사의 원고를 투고할 출판사를 골랐는데, 리사가 루스에게 얘기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한 출판사에 투고 후 출간 계약까지 맺는다. 리사는 이 소식을 며칠 지나서야 루스에게 전달한다. 루스는 왜 이 소식을 자신이 듣지 못하고, 며칠이나 지나서야 듣냐는 이유로 리사에게 캐묻는데. 이때 리사는 1) 넌 원래 전화가 잘 안 되잖아 (한 며칠, 매일 전화했다고 루스가 직전 대사에서 언급했음에도 거짓으로 회피) 2) 이게 뭐가 중요해 3) 왜 이렇게 몰아세워? 등 이상한 변명을 지껄이다가, 4) 기분이 이상했다, 5) 잘 모르겠다, 갖은 회피와 변명을 우르르 내뱉다가 결국에는 말꼬리를 스승의 첫사랑 얘기로 끌어다가 옮기며 스승에게서 도리어 관대한 사과를 받는다.
둘은 투고할 출판사를 합의했다고 대화에서 이미 언급한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 나누었다는 뜻이다. 고로, 한쪽이 상대방과의 합의를 어겼다는 뜻.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스승이 제자를 원칙적으로 교육하지 않아서 답답했으나, 이 정도는 ‘관대함’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꼬집고 싶은 건, 스승이 먼저 본을 보였는데도 배우지도, 자신의 잘못에 사과하지도 않고, 변명과 회피, 모르겠다면서 외면하다가 종래에는 사실 자신의 안에 있는 답을 기어코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들은 후에야 ‘그래, 미안해, 잘못했어, 됐어?’라는 식으로 뻔뻔하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1) 사실은 잘못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2) 처음에는 모르는 척, 3) 캐물으면 이런저런 변명을 대충 지어서 막다가 4) 도저히 안 되면 상황을 외면하려 하지만, 5) 사실은 외면조차도 스스로 하기 어렵기에 루스의 날카로운 포착 앞에서, 없는 양심마저 이리저리 찔리다가 결국에는 ‘열폭’해서 ‘어쩌라고 너 때문이야!’를 날리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점이 리사가 좋은 사람인 척, 멋진 작가인 척하려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린다.

4. 첩첩이 겹쳐지는 거짓과 위선.
리사는 처음으로 루스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루스를 추앙하는 듯 행동하며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을 만나서, 영적 체험을 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 그러면서 나중에 자신이 단편소설을 출간한 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장편을 출간하지 못했으니, 평단의 인정을 제대로 못 받은 게 아니냐고. 마치, 성인이 되지 못한 것과 다름없지 않으냐는 말을. 하지만 나는 단편소설집을 출간했으니, 곧장 장편을 출간해서 평단의 인정을 받으리라! 리사는 루스에게 이따위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물론, 이때도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이미 인지하고서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죄송하다며 무마하려 하지만, 그런 속빈 강정 같은 사과가 루스에게 먹힐 리가 없다.
극에는 많은 의도가 있지만, 나는 이 극을 창작한 작가가 리사라는 캐릭터를 어떤 이유로 이렇게 창작했는지 진짜 너무 궁금하다. (여담으로 프로그램북을 못 사서 천추의 한이다. 이렇게 못 사고 넘긴 극이 한둘이 아니다. 다들 나처럼 후회하지 않길….)
나도 글을 쓰는 작가이고, 창작서 당연히 의도를 가지고 인물을 배치한다.
그런데 이런 내가 봤을 때, 리사라는 인물은 정말 루스를 돋보이게 하거나 당대의 젊은이들을 소위 후려칠 의도였던 건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게 그렸다는 느낌이다.
리사는 등단한 이후에 속물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다. 내가 예시를 든, ‘등단 전과 등단 후의 변화’라는 단적인 예시만 놓고 본다면, 등단이라는 계기, 즉 극에서도 나오지만, 단순화한다면 부의 변화라는 계기가 리사의 변화를 이끈 극적인 요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에 얘기할 공간의 침범에 관해서 잠시 얘기하자면, 등단 전에도 이미 리사는 그토록 추앙하는 듯 보였던 루스의 의자에 앉고, 공간을 함부로 하는 등 (마음대로 정리한 후에 > 나에게 물어보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겠다는 역전된 주인으로서의 행동) 의 행동을 일삼고, ‘초대받았던’ 공간을 자기 멋대로 다루다가 결국은 ‘안 열어? 빨리 열어.’의 고압적인 자세로 나아간다.
여러모로 1920년대의 젊은이들, 정확히는 20대를 대단히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 키워드를 꼽자면. 1) 내 멋대로 2) 무분별한 복제 3) 불신을 빙자한 자기 확신 4) 3을 바탕으로 한 윗세대를 향한 불신 5) 패러다임 붕괴 등 사회가 거의 전방위적으로 완전히 뒤바뀐다는 사실을 하나의 단순화된 공간의 극을 통해서 신선하게 무대 에서 보인다.
이때, 리사가 가진 거짓과 위선은 루스를 향한 추앙에서 드러나지만은 않는다.
루스를 향한 경멸에서도 드러난다.
리사는 루스의 첫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장편 소설을 쓰고 만다. 이때 루스는 당연하게도 자신의 삶, 사생활, 그 자체를 털어 갔다면서 리사를 맹공격한다. 리사는 앞서 말한 모든 방어기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루스를 공격하는 말을 몇 가지 꺼낸다.
너, 마조히스트 아니냐. 당신이 미스 하비샴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냐. 나는 이 글로 당신을 교정하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한 사람을 넘어서, 한 세상의 패러다임을 깨는 일은 말도 안 되게 어렵고 고단한 일이다. 그를 위해서 고난을 짊어졌다면. 나의 도덕적 잣대로는 용납이 불가하나, 세상을 진일보하고자 하는 리사의 욕심이 있었음을 이해하겠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든 내용을 아는 채로 두 번째 관극 후, 전부 말도 안 되는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의 수발을 들면서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한 시절을 자신의 현재 도덕적 관점으로 바꾸고 싶다. 리사는 루스의 삶을 고스란히 훔쳐서, 이름만 바꾸어 자기 이름의 소설로 출간하고는 그게 자신의 절대적인 목적이었던 양, 한참의 회피 끝에 진담을 외친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나온 지긋지긋한 변명은 앞서 말한 또다른 방식의 자기 확신이었다. ‘결국에는 이렇게 나를 키워 낸, 네가 자랑스럽지 않아? 나는 네가 뿌듯해할 줄 알았어. 나와 내 글을 보고 말이야!’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이에게서 소재를 얻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어휴.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는 사실 여기까지 다다랐으면 절필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솔직한 심정. 근데, 시선을 넓혀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의 삶에서 글의 소재,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소재와 글의 전체, 시놉시스 또는 줄거리의 완성본을 얻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남의 인생을 자기 소설에 낱낱이 까발려서 인생을 홧홧하게 만들어 놓고는. 자! 나를 봐. 자랑스럽지 않아? 이렇게 빛나는 나를 봐! 내가 장편을 썼잖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을까. ‘너는 쓰지 못한 장편소설을 내가 썼어!’
‘넌 나를 가르쳤지만,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해!’

이렇게 결국, 리사의 모순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스에게 모순이 없는 건 아니다.

5. 말을 조심해야.
내가 삶의 지표로 보는 컨텐츠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인 웹툰 ‘가담항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진실은 그 자체로 힘이 있어.
네가 내뱉으면, 내가 들으면. 내가 죽어도, 네가 죽어도. 이미 세상에 나왔기에, 그 자체로 힘이 있어.
들은 사람이, 말한 사람이 없어져도. 결국에는 말이, 생각이 세상에 나왔다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대단히 쉽게 여긴다. 내가 입 다물고, 들은 상대방만 통제하면 되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말을 하고, 듣는 사람이 생기면서. 나와 상대방의 행동이 바뀐다. 말을 했다, 들었다. 단순히 끝나지 않는다. 이후의 행동까지 영향을 준다.
그런 식으로 삶에 영향을 주기에 언행에 더더욱 진중히 무게를 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말이라는 것이 취사 선택이라는 방식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리사에게 이롭게 이용되었을 때. 루스는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냐, 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식으로 자신이 스스로 내뱉은 말을 부정한다. 교육자라면 자신의 말이 1) 퍼져 나가서, 2) 어떻게 돌아올지, 예측은 못하더라도 생각해야 했다.

6. 관대함보다는 엄격하게.
앞서, 리사가 회피했다고 했다. 이럴 수 있던 이유는 루스가 용서하는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인데. 이때 루스가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행동했어야 했다. 자신이 화 또는 불쾌했던 부분을 양보하지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선, 세상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리사에게 알렸다면. 리사가 자신의 삶을 빼앗고도 그저 회피하면서 변명하는 도망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해 본다.

더불어 극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7. 공간의 멋진 활용.
초대받았던 공간을 침범하다 못해서 점차 자신만의 공간으로 바꾸는데도 오히려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이를 위한 극이 바로 ‘컬렉티드 스토리즈’라는 극이다 싶다.
공간, 오로지 그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을 위한 내밀한 곳을 리사는 조금씩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런 방식으로 리사와 루스의 삶이 극에서 교차한다.

초반에 리사는 루스의 조교를 하고 싶어 하고, (영적 체험 등의 이유로) 이후 리사가 루스의 개인 공간을 허락 없이 정리하고, ‘내게 물어본다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얘기하겠다’는 말을 한다. 나는 그게 정말 ‘주객전도’되었다는 생각이고, 루스에게는 불합리하며 공간의 객체인 리사의 방식으로 공간이 재정립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최종적으로는 루스가 ‘네가 (리사가) 다녀가면 물건이 없어진다’고 말하는데, 심지어 리사는 이 말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루스의 공간을 마치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어서 엎는 듯한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
무대는 하나이고, 극은 실시간으로 흘러간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편집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부분만 관객에게 보일 수 없다. 그렇기에 공간을 적절하게 설정하고, 이야기 흐름에 맞게 배치해야 한다. 이 극은 그 지점을 정말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완성했다.
극은 오로지 하나뿐인 공간을 그토록 자유자재로 쓴다. 정말 극적으로 잘 활용했다.

 

8. 기억의 침탈
앞서, 작가로서 타인에게서 글감을 얼마나 얻어와도 될 것인가, 이 이야기를 잠시 한 적이 있다.
오! 세상에. 나는 원칙적으로는, 작가가 글감을 바깥에서 얻어야 한다면 차라리 절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자신의 가슴에 남은 글감이 없다면 글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어떤 인물 또는 직업의 군상을 알아가는 방식과는 별개로 개인을, 심지어 그 삶을 침탈해야 한다면. 나는 그 작가는 작가로서의 힘을 완전히 잃었다는 게 아닌가 싶다. 실제의 생명이 아니고서는 가상을 구상할 수 없다는 뜻이고, 자신의 안에 남은 창작의 원동력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사가 공간, 즉 물리적인 영역부터 비물리적인 영역까지 장악하는 모습을 극에서는 순차적으로 보여 준다. 러닝 타임이 길지는 않지만, 그 안에 설득력이 담긴 것처럼. 물리적인 영역에서 비물리적인 영역까지 넘어오는 일이 극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설득력 있게 이루어진다.
중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퇴색하며 자연스레 자신을 잃은 듯 느껴지는 루스의 모습. 그리고 빛나고 무언가 자신의 외적인 부분에서 번쩍이는 것을 더더욱 갖다 붙인 것만 같은 리사의 모습. 극은 공간과 인물, 극이라는 제한적 요소에서 그 한계를 너무나 쉽게 뛰어넘으며 삶이 역전된다.
극의 소품이나 전체적인 배경에서 변화가 크게 없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완성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무척 놀랍다.

이렇게 멋진 극이 벌써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부디 또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기를! 좋은 시간을 돌이킬 수 없으니, 다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면 놓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제안한다.

+ 이번에 다시금 느꼈는데, 극이 마음에 든다면 한 번에서 관람을 멈추면 안 된다. 극을 머리에 둔 채로 다시 보면, 처음에 놓친, 또는 이미 흐름을 어느 정도 알기에 새로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알게 되면서 관극의 재미와 쾌감이 몇 배가 된다는 사실을, 이 집중도 높은 극에서 다시금 느꼈다.